교황청 인준 성모 발현 - 1608년 리투아니아 실루바의 성모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준된 성모 발현지는 전 세계에서 총 16군데로 그중 리투아니아 실루바는 시기장 세 번째 성모 발현지로 1531년 멕시코의 과달루페, 1590년 폴란드의 레이자스크와 함께 교황청의 공인을 받은 최초의 3대 성모 발현지입니다. 1608년에 일어난 실루바의 성모발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비타우타스 대제의 외교관이었던 페트라스 게드 가우다스(Petras Gedgaudas)는 1457년에 실루바에 교회를 설립하고 리투아니아로 로마를 여행 중에 얻은 동정 마리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가져와 실루바에 있는 새로운 교회에 걸었습니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이 유럽을 휩쓸었을 당시 그 영향을 실루바도 받게 되는데 지방의 총독은 1532년 많은 귀족과 지식인들처럼 열렬한 칼빈주의자가 되었고 실루바의 가톨릭 신자들은 저항하는데 무력하였습니다. 교회가 소유한 재산이 몰수되었고 칼빈주의자들에게 그 땅이 넘어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실루바 교회의 교구 사제는 철제 상자를 만들어 동정 마리아와 아이의 그림, 전례 조끼, 그리고 그 땅을 비타우타스 대제가 가톨릭 교회에 주었다는 문서를 상자에 넣은 후 상자를 봉인하고 큰 바위 근처의 땅 깊숙이 묻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 가장 오래된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은 가톨릭 교회가 마을에 있었다는 것을 희미하게 기억했지만 아이들은 칼빈주의 신조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울면서 바라보았는데 눈물이 너무 많아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으며 눈물의 일부는 바위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상한 빛이 둘러쌌습니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그저 서서 바라보았고 곧 여인은 사라졌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백성에 의해 경배를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신성한 흙을 쟁기꾼과 경직자에게, 그리고 방목을 위해 동물에게 넘겨주었다.
인근 마을에 100세가 넘은 맹인이 살고 있었는데 발현에 관한 이야기가 그에게 들려왔고 그는 80년 전 홀럽카 신부가 큰 바위 옆에 교회 보물로 가득한 철제 상자를 묻도록 도왔던 것을 회상합니다.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을 찾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마을 사람들이 그곳으로 인도하였는데 그 자리에 도착하자 그는 기적적으로 시력이 회복되고 그것이 묻혀 있는 정확한 지점을 그가 가리켰습니다.
땅을 파헤쳐 사람들은 상자를 찾았고 그것을 열어보자 거기에는 마리아와 아이의 그림, 여러 개의 금색 조끼, 교회 증서와 그 외의 기타 문서들이 들어있었습니다.
1622년, 법원은 교회가 가톨릭 소유임을 인정하였으며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순례자들의 발길이 멀리서 이어졌습니다.
대성당에 그 그림은 영구히 안치되어 있으며 실루바의 기적적인 이미지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예술가 토마스 포다이스키(Thomas Podgaiskis)가 디자인하였으며 이러한 내부는 2세기 이상 동안 큰 수정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실루바의 성모 발현은 루르드와 파티마에 성모님이 나타나시기 250년 전에 일어난 일로 교황 비오 VI에 의해 1775년 8월 17일 인준되었습니다.
1608년 리투아니아 실루바의 성모 발현
1. 성모 발현 이전
리투아니아는 1251년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지막 유럽 국가로 1387년 영국의 영왕과 결혼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폴란드의 왕인 Wladyslaw II Jagello(조가일라)는 결혼하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교도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개인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비타우타스 대제의 외교관이었던 페트라스 게드 가우다스(Petras Gedgaudas)는 1457년에 실루바에 교회를 설립하고 리투아니아로 로마를 여행 중에 얻은 동정 마리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가져와 실루바에 있는 새로운 교회에 걸었습니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이 유럽을 휩쓸었을 당시 그 영향을 실루바도 받게 되는데 지방의 총독은 1532년 많은 귀족과 지식인들처럼 열렬한 칼빈주의자가 되었고 실루바의 가톨릭 신자들은 저항하는데 무력하였습니다. 교회가 소유한 재산이 몰수되었고 칼빈주의자들에게 그 땅이 넘어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실루바 교회의 교구 사제는 철제 상자를 만들어 동정 마리아와 아이의 그림, 전례 조끼, 그리고 그 땅을 비타우타스 대제가 가톨릭 교회에 주었다는 문서를 상자에 넣은 후 상자를 봉인하고 큰 바위 근처의 땅 깊숙이 묻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 가장 오래된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은 가톨릭 교회가 마을에 있었다는 것을 희미하게 기억했지만 아이들은 칼빈주의 신조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2. 성모 발현
많은 아이들이 실루바의 마을 외곽 밭에서 양을 돌보고 있던 1608년 어느 여름날 흐느끼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고 아이들은 바위 위에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앉고 서서 비통하게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녀는 그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울면서 바라보았는데 눈물이 너무 많아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으며 눈물의 일부는 바위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상한 빛이 둘러쌌습니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그저 서서 바라보았고 곧 여인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이야기했고 그 소식은 빠르게 퍼져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 바위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다시 흐느끼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고 여인이 나타나 칼빈주의 목사가 여인에게 왜 울고 있냐고 묻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다시 흐느끼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고 여인이 나타나 칼빈주의 목사가 여인에게 왜 울고 있냐고 묻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백성에 의해 경배를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신성한 흙을 쟁기꾼과 경직자에게, 그리고 방목을 위해 동물에게 넘겨주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3. 발현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가톨릭 신앙을 소홀히 한 것을 말씀해 주시려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나셨다는 믿음은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그녀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신성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유일하신 참된 교회로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1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발현의 성당에서 봉헌된 미사 중에 거룩한 영성체를 받았습니다.인근 마을에 100세가 넘은 맹인이 살고 있었는데 발현에 관한 이야기가 그에게 들려왔고 그는 80년 전 홀럽카 신부가 큰 바위 옆에 교회 보물로 가득한 철제 상자를 묻도록 도왔던 것을 회상합니다.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을 찾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마을 사람들이 그곳으로 인도하였는데 그 자리에 도착하자 그는 기적적으로 시력이 회복되고 그것이 묻혀 있는 정확한 지점을 그가 가리켰습니다.
땅을 파헤쳐 사람들은 상자를 찾았고 그것을 열어보자 거기에는 마리아와 아이의 그림, 여러 개의 금색 조끼, 교회 증서와 그 외의 기타 문서들이 들어있었습니다.
1622년, 법원은 교회가 가톨릭 소유임을 인정하였으며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순례자들의 발길이 멀리서 이어졌습니다.
대성당에 그 그림은 영구히 안치되어 있으며 실루바의 기적적인 이미지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4. 성지
현재의 리투아니아 마리아 탄생 대 성당은 1786년에 축성되었습니다.리투아니아 예술가 토마스 포다이스키(Thomas Podgaiskis)가 디자인하였으며 이러한 내부는 2세기 이상 동안 큰 수정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리투아니아 성모탄생 대성당
- 대성당 내부
- 예배당, 예배당 안의 발현하신 살루바의 성모님
-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위

5.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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